● 에제 37,12ㄴ-14; 로마 8,8-11; 요한 11,1-45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부활 대축일을 두 주 앞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하고 약속하시면서, 이로써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나라가 망해 바빌론이라는 먼 나라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것을 뜻합니다. 이 예언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민족의 죽음과 민족의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베타니아에 살고 있던 라자로라는 사람이 죽은 뒤 예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를 예수께서 잘 알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 라자로가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 연락이 왔고 예수께서는 위험한 유다 지역으로 가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못 알아들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해 생명의 권능을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장차 이루어질 부활을 앞서 보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는 한 마디 말씀으로 기적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 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목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바로 뒤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1,50에서 대사제 카야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11,52은 이 말의 결과를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을 설파하기 위해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는데, 오히려 이 기적이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늘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사건의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살아도 죽은 사람”과 “죽어도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인 로마서는 이에 대해 간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요,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육 안에 사는 자란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익을 좇아 사는 사람은 계산에 밝습니다. 계산에 밝기 때문에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라면 한 사람쯤은 태연히 죽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 자기들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면서도, “백성을 위해서”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할 정도로 사악합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올바름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위인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치고 당대에 인정받고 명예를 얻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거나 오해와 비난을 받던 중에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위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을 전하고 있으니 영원히 살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삶이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돌아보기를 촉구합니다. 살아도 죽은 사람 편에 들어 있는지, 죽어도 살아 있는 사람 편에 들어 있는지, 그리고 어느 쪽에 속하고 싶어 하는지 솔직히 깨닫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 에제 37,12ㄴ-14; 로마 8,8-11; 요한 11,1-45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부활 대축일을 두 주 앞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하고 약속하시면서, 이로써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나라가 망해 바빌론이라는 먼 나라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것을 뜻합니다. 이 예언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민족의 죽음과 민족의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베타니아에 살고 있던 라자로라는 사람이 죽은 뒤 예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를 예수께서 잘 알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 라자로가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 연락이 왔고 예수께서는 위험한 유다 지역으로 가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못 알아들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해 생명의 권능을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장차 이루어질 부활을 앞서 보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는 한 마디 말씀으로 기적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 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목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바로 뒤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1,50에서 대사제 카야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11,52은 이 말의 결과를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을 설파하기 위해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는데, 오히려 이 기적이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늘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사건의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살아도 죽은 사람”과 “죽어도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인 로마서는 이에 대해 간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요,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육 안에 사는 자란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익을 좇아 사는 사람은 계산에 밝습니다. 계산에 밝기 때문에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라면 한 사람쯤은 태연히 죽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 자기들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면서도, “백성을 위해서”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할 정도로 사악합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올바름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위인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치고 당대에 인정받고 명예를 얻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거나 오해와 비난을 받던 중에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위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을 전하고 있으니 영원히 살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삶이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돌아보기를 촉구합니다. 살아도 죽은 사람 편에 들어 있는지, 죽어도 살아 있는 사람 편에 들어 있는지, 그리고 어느 쪽에 속하고 싶어 하는지 솔직히 깨닫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