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을 짓기 위해서 먼저 4개의 업체로부터 지명원을 받았다. 네 개의 업체 중에서 한 개 업체를 지정해서 수의계약을 했다. 한옥은 목수 혼자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팀 구성이 좋아야 아름다운 한옥이 서게 된다. 4개 업체 중에서 한 업체를 선정한 기준은 어떤 사람들로 팀이 구성되고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한옥공사가 끝날 때까지 끝까지 참여 하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왜냐하면 문화재급이 자기가 참여하겠다고 사인해 놓고 실제로는 자기 밑에 사람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4개 업체를 살펴보니, 로하스 건축이라고 이연성(아브라함)이 운영하는 회사가 있는데 가장 많은 무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팀으로 수의계약을 맺게 되었다. 지붕을 얹는 번와장은 이근복으로 당시 우리나라 무형문화재협회 회장이었다. 석장 임동조도 무형문화재이다. 두석장 박문열, 도편수 정태도 등 모두 무형문화재들이었다. 로하스와 계약을 하고 이 무형문화재들을 모아서 주임신부가 직접 이 분들에게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의 요지는 “여러분들이 여러 작업을 한 것 중에 하나의 수준으로 작업할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아빠의 대표적인 작품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아빠의 대표적인 작품은 북촌한옥마을에 조그마한 성당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예쁜 한옥이 하나 있단다. 그것이 아빠의 대표적인 작품이야.’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건축주가 자기네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자긍심을 심어준 경우는 전무후무라고 하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그래서 이 분들이 혼신을 다해서 작업에 임하였다.그래서 실제로 한옥을 짓는 사람들이 보고 감탄할 정도로 지어졌다. 한옥 안의 상량문은 주임신부가 작성했고 글씨는 붓글씨 부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한탁근 형제가 직접 썼다.


자재 구입 과정은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한옥 바람이 불어서 국내송을 구하기 어려웠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딸려서 대부분 수입 소나무인 외송을 쓰는 분위기였다. 그러다보니 숭례문까지도 러시아산 소나무라는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만큼 국내송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외송을 수입해서 지으려는 것을 주임신부가 막았다. 전국을 뒤지면 한옥을 지으려고 베어 놓았으나 계획이 취소되어 안 지어져서 보관중인 나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니 전국을 발품을 팔아서라도 뒤지라고 했다. 그래서 이연성은 전국을 뒤졌고 마침내 홍천에서 춘향목이라고 부르는 적송을 구하게 되었다. 모두 함수율이 15% 이하로서 상태가 좋아 목수들이 이 나무를 쓰다듬고 감탄을 하기도 했다.


한옥의 마루는 대청마루, 쪽마루, 누마루로 되어있다. 길 건너에서 보면 대청마루를 통해서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계단의 느낌을 가지고 성당을 바라 볼 수 있다. 쪽마루는 외부관광객들이나 순례자들이 와서 언제라도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게 했고, 누마루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붕의 암막새와 수막새는 오병이어를 상징하고 김미경(요안나) 가무상으로 조각했다. 목수들이 얼마만큼 정성껏 만들었는지는 구석구석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목수들은 기둥 위의 창방머리를 구름의 형태로 조각했다. 그 구름은 지붕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누마루는 목수의 더욱 섬세한 손놀림을 볼 수 있다. 누마루의 손잡이를 유심히 보면 꽃대 위에 꽃받침을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누마루에 앉으면 그 꽃받침 위에 있는 내 얼굴은 꽃이 된다. 이렇게 한옥을 짓는 목수가 누마루에 꽃대와 꽃받침을 조각하므로 해서 누마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모두 꽃으로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은 한옥이 되었다. 


나무는 모두 손대패로 치목을 했다. 기계 대패는 보푸라기가 생기지만 손대패는 면이 매끄럽고 광이 나며 발수 효과가 있어서 내구성을 향상 시킨다. 뿐만 아니라 손대패는 한 번에 깎을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있어서 손이 가는 1m 정도마다 결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가회동성당의 한옥에는 어떤 나무에도 결이 없다. 그만큼 목수들의 손대패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한다. 


국산 적송이 좋은 이유는 송진을 충분히 먹고 있기 때문에 내구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벌레가 안 먹는다. 한옥을 짓는데 최고의 재목으로 여겨온 적송은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자재 가격을 금액으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따라서 적송을 사용하고 문화재급의 장인들이 직접 참여한 것을 감안하면 평당 2천만 원의 비용을 들였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비용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연성 대표가 성당의 한옥을 짓고 난 후 파산하여 운영하던 한옥건축회사를 접고 다시 취업을 해야만 했다.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지만 주임신부는 집장사가 짓는 싸구려 집을 짓고 싶지 않았다. 1795년 부활대축일에 분명히 한옥에서 첫 미사가 드려졌을 것이기 때문에,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미사가 드려진 지역을 관할하는 본당의 한옥을 제대로 짓고 싶었던 것이다. 주임신부가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한옥은 이와 같이 상징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건축비용을 저가로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한옥의 작품성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어떤 대목장은 문하생을 데리고 와서 견학을 시키거나, 대학교의 건축과 학생들이 견학을 오기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건축위원회에서 심의를 받을 때 한옥의 용도를 전시실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주임신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임신부는 교구 건축심의위원들을 설득해서 한옥을 신자들에게 내어주고 언제라도 와서 편안하게 쉬며 내 방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당의 신자들이 모두 한옥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라도 성당에 오면 자신도 한옥이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개방하여 본당신자들의 사랑방으로 쓰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