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가회동이 정식으로 본당이된 것은 1949년이고, 이후 1954년에 성전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성전이 낡아 2011년부터 옛 성전을 허물고 현재의 새 성전을 짓게 되었다.2013년 11월 21일 준공되었고, 준공 3일 후인 24일(그리스도왕대축일)에 입주하여 입주미사를 봉헌하였다. 현재의 새 성전은 과거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2014년 4월 20일 부활대축일에 서울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2010년 2월 송차선신부가 가회동본당에 발령을 받아 부임 후 옛 성당의 안전진단 검사를 검토한 결과 안전에 상당한 우려가있다고 판단하였다. 주임신부는 재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타당성 조사와 지역의 특성(LOCATION),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면밀히 검토하여 가회동성당이 역사 안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밝혀내었다.
조선에 입국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이곳 가회동지역(북촌심처)에 위치한 최인길(마티아)의 집에서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사를 집전하였고, 이후 이곳 가회동 본당 관할 내에 주로 거처하며 6년간 사목하셨다. 그러므로 가회동은 가히 한국 천주교의 첫 본당이요, 한국 천주교회의 모(母)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91년 유교식 조상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지만(신해박해),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체포를 막기 위해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가 순교한 것으로써 한국 천주교에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새롭게 지어지는 가회동본당은 관할 안에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가 봉헌되었고, 이로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역이며, 마지막 황실에서 모두 세례를 받으므로 해서 신앙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선교본당으로서의 역할을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특성인 북촌한옥마을의 문화적 위치를 반영하여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선비하고 벽안의 외국인 신부님하고 어깨동무하는 형상으로 가자.'는 것을 설계의 기본으로 하였다. 또한 북촌한옥마을에 어울릴 수 있도록 단순하고 소박하게 디자인하였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양복 입고 갓 쓴 꼴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양복은 양복대로 갓은 갓대로, 다시 말하면 한옥과 서양건축을 그대로 살리고 디자인 요소를 교감 시키자는 것이었다. 어깨동무를 하는 것은 교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동서양의 디자인 요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러한 충돌을 막고 교감 시킬 수 있는 디자인으로 가자는 것이 기본 컨셉이었다. 그러므로 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그의 부족한 기능성을 서양건축으로 보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