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실에 절을 하는 관습의 유래, 성체조배의 시작

관리자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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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강복은 통상 성체현시(Expositio Eucharisticae), 성체조배(Adoratio Eucharisticae)와 병행하여 거행되며 성체거동과 함께 성체공경 신심의 대표적인 것이며 또한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고유전례라고 할 수 있다.

성체에 대한 흠숭과 존경의 표시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다. 성찬례에 참석한 신자들은 성체를 집으로 모셔가기도 했고 또 노자성체 위해 정성껏 보관하기도 하였다(유스띠노 호교론 1,67; 히뽈리또 사도전승 32). 초대 교회이래로 성찬례 밖으로 성체를 모셔갈 때 무릎을 꿇거나 부복을 하기도 하였고 이러한 공경의 형식은 오늘날 비잔틴 전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의 조배를 위해 성체를 일정한 장소에 현시하거나 성체께 올리는 특별한 예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체는 눈에 띄지 않는 견고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교회 건물은 신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예배를 위해 모이는 단순한 용도로 이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신자들이 자유로운 시간에 기도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고 특히 수도원의 부흥과 더물어 성당은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으나 아직 성당의 중심은 제대였고 감실은 성체보존을 위한 단순한 장소로 여겨졌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체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성체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신심이 발흥하면서 성체공경에 대한 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심(Devotio moderna)은 직접적으로는 전례의 쇠태에 의해 기인된 것이었다. 서방교회에서의 전례의 쇠태 전례가 라틴어를 고집하여 신자들이 전례언어를알아듣지 못하게 되었고또한, 전례가 집권계층을 위한 예절이 되어갈 때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특히 중세기에 신심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Ad Patrem per Filium)” 나아가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일치,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신심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경향 아래서 눈에 보이는 성체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신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체를 특별히 공경하여야할 열의를 마음에 심어주었고 그래서 성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집전되는 미사에서보다는 개인적인 묵상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체의 현시등을 통한 미사 밖의 신심행사에서 더욱 큰 흠숭과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성체는 중재자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표징이 되었고 천상과 지상을 연결시키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환자들을 위해 성체를 보관하던 제의방 안의 금고같은 형태의 감실이 9세기 말엽부터 성당 제단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렇게 성체신심이 점차 발전하면서 11세기말경클뤼니 수도원 등에서는 감실 앞에서 절을 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더 나아가 감실을 장식하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징하는 등불감실 곁에 켜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체 신심이 확장되면서 12세기 경에는 성체공경을 위한 고유예절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성체 공경 신심이 중세 중기를 지나 더욱 발달함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제대 위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노출되었기 때문에 감실성체훼손되는 것을 막기위해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감실을 잠글 수 있는 장치를 하라고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감실은 갈리아, 이탈리아, 독일등을 거쳐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성당 제단 앞에 탑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감실을 모셨으며 금속재료유리를 함께 사용하여 성체가 보여지게끔 제작하기도 하였고 이는 성광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성체에 대한 다양한 신심행사들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독일 지방에서는 14세기에 성체 축일(Corpos Domini)에 성체거동을 한 후 성체를 현시해 놓고 성무일도를 드렸으며 미사까지 봉헌하기도 하였다.


1372년 독일 브란덴부르그 주교서방교회의 6대축일(성탄, 부활, 성령강림, 성체축일, 성전봉헌축일, 모든성인의 날)에 위와 같은 성체 공경을 명하였다.


또한 성녀 도로테아의 삶에 관한 1394년의 기록을 보면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성광에 모셔져 있는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이러한 성체현시의 관습은 연중 다른 날에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태리프랑스 지방에서는 예수가 무덤속에 계셨던 시간을 상징하여 40시간의 성체조배가 유행하였고 이러한 성체현시와 조배는 16세기에 이르러 성체강복으로 끝을 맺게 되었는데 1600년의 교황 클레멘스8세의 예식서(Ceremoniale episcoporum) 성체축일날 성체거동 후 Tantum ergo를 부르고 천상양식(Panem de caelo) 후렴 뒤 강복 기도문(Deus qui nobis)을 바치며 이어서 성광을 들어 강복을 하는 전통형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트렌토 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이 성체의 실체변화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성체신심은 한층 강화되었고 그리스도 현존의 상징이 되는 감실은 더욱 화려하게 장중하게 치장되었으며 성당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감실이 세워지게 되었다. 반 개혁운동이 강했던 이탈리아 밀라노의 경우 교구 내 성당들이 돌아 가면서 한 시간씩 성체를 현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바로크 시대를 중심으로 성체 신심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체공경이 활발하게 펼쳐졌고 이와같은 성체신심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성체신심의 지나친 발전은 오히려 영성체를 소홀히하고 미사의 공동체성과 미사 안에서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제사에 관한 신비신앙을 저하시키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지나치게 남용되는 듯한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20세기 전례운동을 통해서 다른 신심행위들과 함께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게 된다.

 

원제: 성체강복 (聖體降福) / 1. 성체 공경의 역사

 

 


이완희 신부

작성  이완희 신부 
*주요경력* 1987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사제서품1987-1989 부평4동, 제물포, 주안5동 보좌신부/ 1989-1995 로마유학 (성안셀모대학교, 전례학)/ 1996-1999 인천교구 양곡주임/ 1999-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사목부장, 도서관장, 전산실장,영성부장, 사무처장, 교무처장, 대학원장 역임)/ 2000-현재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2006-2009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인천교구 만수1동성당 주임신부/ 주교회의 성음악소위원회 총무/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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