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인가?
‘교회’(敎會, Ecclesia)란 말은 원래 희랍어로 ‘불러 모으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즉 ‘교회’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사람들의 모임 혹은 집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뜻이 있으시어 불러 모으신 모임인 교회는 어떠한 사람들의 모임일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시간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의 모임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시간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분이 있다면,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그 존경하는 분께 시간을 내어 드림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하느님을, 그리고 동료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당연히 그분께 나의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지요.
교회는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니, 돈도 명예도 권력도, 혹은 학식도 예술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건강이나 쾌락도 아니요, 남편이나 자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 그리고 확실한 희망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그분뿐이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그분뿐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임
교회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자기 자신의 현세적 바람이나 욕망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영위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사는 모습은 도무지 외교인과 차이가 없는 사람은 이 모임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곧 복음의 정신에 일치하는지 계속해서 숙고하고 반성하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 어떠합니까? 혹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은 옳고, 다른 집단은 잘못되었다는 편견에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가 속한 집단이란 많은 경우 옳고 그름과는 무관한, 하나의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대 심리학의 연구결과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구는 내편, 누구는 다른 편, 이런 식의 편 가르기는 많은 경우 결국 상대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편, 저편 하는 식의 편 가르기나, 누구를 배척하고 왕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선입견 없이,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요? 이편에서 보면 이편이 옳고, 저편에서 보면 저편이 옳을 수 있음은 세상사의 한 단면이니, 교회 안에서의 구성원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두 수도회 사이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담벽 안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가을이면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고, 예수회 수도원 안에까지 그 가지를 드리웠습니다. 그런데 산보를 하던 예수회 신부님이 자꾸 감을 하나 둘 따먹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본 프란치스코회 수사님들이 뿔이 났습니다. 그래서 “왜 자꾸 남의 것을 따먹습니까? 이 감은 우리 수도원 것인데요.” 하니, 예수회 신부님들은 “무슨 말이요? 이 가지들이 우리 땅에 와 있으니 우리 담 안에 열린 열매는 우리 것 아니겠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란 말이오.” 하는 것 아닙니까! 급기야 그들은 오는 주일 오후에 서로 대표를 한 명씩 뽑아 보내 이 문제를 담판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수사님들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수회 신부님들은 대부분이 박사들인데, 자신들은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도 특별히 언변이 있는 사람도 없으니 큰일이다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하기를, 그래도 세상물정을 좀 아는 주방수사님을 보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주방수사는 시장에 자주 가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많이 접했으니 다른 수사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주일 오후, 두 수도회를 대표하는 신부님과 수사님이 마주 앉았습니다. 먼저 예수회 신부님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수사님이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었습니다. 이번엔 신부님이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수사님은 고개를 숙였고, 신부님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풀이 죽어 돌아온 신부님이 결과를 보고하자, 예수회 신부님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수사님들이 무식하다 싶었는데, 그 영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하느님은 한분이십니다.’라는 뜻으로 손가락 하나만 들어 올렸을 뿐인데, 수사님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리더군요, ‘그분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지요.’ 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세 손가락으로 ‘그분은 삼위일체이십니다.’ 했더니, 수사님은 그분 밖에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하고 돌아온 겁니다.”
의기양양해서 돌아온 수사님에게 프란치스코 수사님들이 달려들다시피 다가섰습니다. “어떻게 잘 된 모양이지요?” 수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앉자마자 신부님이 손가락 하나로 제 눈을 찌르려고 하길래 제가 두 손가락으로 맞섰지요. 이번엔 손가락 세 개로 저를 공격하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피하고 보자 싶어서 고개를 숙였지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같은 날 같은 일을 두고 양쪽 수사님이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혼의 위기에 처한 부부들의 경우에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에 너무나 인색한 아내와 남편은 똑같은 일을 두고도 서로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친교와 일치를 지향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자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옳을 수 있는 만큼 남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쁘레시디움에서도 이 단원은 이 단원대로, 저 단원은 저 단원대로 옳을 수 있겠죠.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0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인가?
‘교회’(敎會, Ecclesia)란 말은 원래 희랍어로 ‘불러 모으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즉 ‘교회’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사람들의 모임 혹은 집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뜻이 있으시어 불러 모으신 모임인 교회는 어떠한 사람들의 모임일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시간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의 모임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시간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분이 있다면,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그 존경하는 분께 시간을 내어 드림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하느님을, 그리고 동료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당연히 그분께 나의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지요.
교회는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니, 돈도 명예도 권력도, 혹은 학식도 예술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건강이나 쾌락도 아니요, 남편이나 자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 그리고 확실한 희망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그분뿐이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그분뿐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임
교회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자기 자신의 현세적 바람이나 욕망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영위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사는 모습은 도무지 외교인과 차이가 없는 사람은 이 모임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곧 복음의 정신에 일치하는지 계속해서 숙고하고 반성하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 어떠합니까? 혹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은 옳고, 다른 집단은 잘못되었다는 편견에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가 속한 집단이란 많은 경우 옳고 그름과는 무관한, 하나의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대 심리학의 연구결과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구는 내편, 누구는 다른 편, 이런 식의 편 가르기는 많은 경우 결국 상대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편, 저편 하는 식의 편 가르기나, 누구를 배척하고 왕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선입견 없이,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요? 이편에서 보면 이편이 옳고, 저편에서 보면 저편이 옳을 수 있음은 세상사의 한 단면이니, 교회 안에서의 구성원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두 수도회 사이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담벽 안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가을이면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고, 예수회 수도원 안에까지 그 가지를 드리웠습니다. 그런데 산보를 하던 예수회 신부님이 자꾸 감을 하나 둘 따먹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본 프란치스코회 수사님들이 뿔이 났습니다. 그래서 “왜 자꾸 남의 것을 따먹습니까? 이 감은 우리 수도원 것인데요.” 하니, 예수회 신부님들은 “무슨 말이요? 이 가지들이 우리 땅에 와 있으니 우리 담 안에 열린 열매는 우리 것 아니겠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란 말이오.” 하는 것 아닙니까! 급기야 그들은 오는 주일 오후에 서로 대표를 한 명씩 뽑아 보내 이 문제를 담판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수사님들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수회 신부님들은 대부분이 박사들인데, 자신들은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도 특별히 언변이 있는 사람도 없으니 큰일이다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하기를, 그래도 세상물정을 좀 아는 주방수사님을 보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주방수사는 시장에 자주 가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많이 접했으니 다른 수사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주일 오후, 두 수도회를 대표하는 신부님과 수사님이 마주 앉았습니다. 먼저 예수회 신부님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수사님이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었습니다. 이번엔 신부님이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수사님은 고개를 숙였고, 신부님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풀이 죽어 돌아온 신부님이 결과를 보고하자, 예수회 신부님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수사님들이 무식하다 싶었는데, 그 영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하느님은 한분이십니다.’라는 뜻으로 손가락 하나만 들어 올렸을 뿐인데, 수사님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리더군요, ‘그분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지요.’ 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세 손가락으로 ‘그분은 삼위일체이십니다.’ 했더니, 수사님은 그분 밖에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하고 돌아온 겁니다.”
의기양양해서 돌아온 수사님에게 프란치스코 수사님들이 달려들다시피 다가섰습니다. “어떻게 잘 된 모양이지요?” 수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앉자마자 신부님이 손가락 하나로 제 눈을 찌르려고 하길래 제가 두 손가락으로 맞섰지요. 이번엔 손가락 세 개로 저를 공격하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피하고 보자 싶어서 고개를 숙였지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같은 날 같은 일을 두고 양쪽 수사님이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혼의 위기에 처한 부부들의 경우에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에 너무나 인색한 아내와 남편은 똑같은 일을 두고도 서로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친교와 일치를 지향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자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옳을 수 있는 만큼 남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쁘레시디움에서도 이 단원은 이 단원대로, 저 단원은 저 단원대로 옳을 수 있겠죠.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0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