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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6월 27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바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고, 최인길은 사제의 복장을 하고 중국말을 하면서 포졸들을 맞아 주문모 신부 대신 체포된다. 그러나 곧바로 신부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윤유일, 지황과 함께 포도청에서 곤장을 맞고 6월 28일 순교하였다. 1801년(신유박해) 순교할 때까지 주문모 신부는 북촌에 있던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주문모 신부는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고, 박해를 피해 한 동안 한양을 떠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간 북촌에 머물면서 북촌의 석정보름 우물물로 세례를 베풀기도 하고,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사목활동을 하였다.
한편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제의 모든 사목 활동을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을 여성 회장에 임명하였고, 강완숙은 노비에서 왕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류의 여성들을 만나 전교에 힘써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니, 주문모 신부의 입국 당시 4,000여 명이었던 신자가 5년 만에 1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여성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강완숙과 함께 살면서 성물을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돕고, 또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살고자 하였다. 윤유일의 4촌 동생인 윤점혜(아가다)는 온전한 신앙생활에 대한 염원으로 동정녀로 강완숙이 집에서 거주하며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돕다가 1801년 7월 4일 순교하셨다. 또 그녀의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와 함께 신앙생활을 위하여 서울 벽동(가회동 근처)으로 이주하여 살며 집에 집회소를 마련하고, 상본과 성물을 만드는 등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돕다가 1801년 5월 14일 순교하셨다.
북경교구청은 조선의 자생교회에 놀랐지만 미사나 고해성사는 성직자에 의해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부랴부랴 신부를 파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는 조선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기에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면 금방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가장 모습이 비슷한 중국신부를 보내게 된다. 그 분이 바로 주문모 신부님이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에 밀입국한다. 겨울에 입국하게 된 것은 압록강이 얼기 때문에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서 얼음을 밟고 국경을 넘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 드디어 최인길(마티아) 집에서 성직자에 의해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된다. 하지만 밀고자가 생기게 되어 주문모신부의 수배령이 내려지게 되자 최인길이 자신이 주문모 신부라고 거짓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역관(오늘날의 통역관)이었으므로 중국말을 굉장히 잘했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라고 자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주문모 신부가 아님이 밝혀지고 주문모 신부는 다시 쫓기는 처지가 되었고 최인길은 곤장을 맞자 죽는 장하치명을 당했다. 첫 미사 전경은 고증에 의해서 복식이나 그때 당시 첫 미사를 드렸던 정황들을 고려하여 수년에 걸쳐서 정성껏 만들고 봉헌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 인형 작가인 임수현(제노베파) 자매가 수년에 걸쳐서 제작한 작품으로서 현재 한옥의 큰 방에 상설 전시되어 있으며 역사전시실의 영상 전시로도 볼 수 있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골롬바) 집에서 숨어서 지내게 된다. 강완숙은 과부였고 남편 없는 아녀자 집에 외간 남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문화 안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므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안전하게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강완숙의 집도 북촌에 있던 충훈부 정문 쪽이라는 기록이 있고 가회동 관할 내에 있다. 한옥의 작은방에는 강완숙의 집에서 숨어 지내던 주문모 신부님을 재현한 것인데, 안을 들여다보면 숨어있는 인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주문모 신부이다. 마찬가지로 집의 형태나 옛날 복식 등 고증을 통해 임수현(제노베파)이 제작한 것이다. 강완숙 집에서 숨어 지내지만 강완숙도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아직 잡히지 않았으므로 주문모 신부가 중국으로 갔는지 안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해서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고 할 것이며 많은 신앙인들이 힘들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 한양으로 되돌아 와서 자수를 한다. 결국 목을 잘라 처형하는 군문효수로 순교한다. 주문모 신부는 백성을 위해서 죽은 것이다. 이렇게 목자와 양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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