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첫 미사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교회의 신자들은 북경에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 5년 여의 곡절 끝에 조선 최초의 선교사이자 성직자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4년 12월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최초로 포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은 최인길 마티아가 주문모 신부의 거처로 준비한 북촌 계동의 가옥이었다. 조선 교회가 열망하던 사제를 마침내 모시게 되어 신도들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주문모 신부는 계동 가옥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가성직제도 아래 영세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보례도 주고 조선말을 배우는 등 조선교회의 사정을 파악해갔다.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한국 천주교회의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주었다.

을묘박해와 최인길의 순교


  1795년 6월 27일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자신이 신부 행세를 하여 대신 체포되었다. 하지만 곧 발각되어 같이 체포된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와 함께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고문을 받고 하루 만에 순교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을묘박해 이후 거의 매년 박해가 반복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거처가 드러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공동체를 돌보고 전교에 힘썼다. 밤에는 성무를 수행하고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는 등 저술 활동을 하였다. '회장제'를 도입하여 교회 조직을 체계화하고, 특히 교리교육과 선교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설립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주문모 신부의 이런 노력으로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박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4천여 명에서 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강완숙 골룸바의 활동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 골룸바를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한다. 강완숙 골룸바는 왕족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주로 여성들에게 신앙을 전하며 전교에 앞장섰다. 또한 피신 중인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신부의 안전을 위해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는 중에도 교리 강습과 강학회를 주관하고 윤점혜와 함께 동정녀 공동체를 이끄는 등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신유박해


  천주교에 비교적 호의적이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신자들의 희생이 커지자 주문모 신부는 자수하였고 결국 1801년 5월 한강 새남터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선교자이자 외국인 사제이며 첫 외국인 순교자가 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체포된 강완숙 골룸바는 형리들조차 감탄할 정도의 강한 믿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같은 해 7월에 순교하였다.


가회동의 순교복자와 성인 21위


  ⟪사학징의⟫, ⟪벽위편⟫, ⟪추안급국안⟫ 등을 통해 거주지가 밝혀진 서울지역의 197명의 천주교 신자들 중 현재 가회동성당의 관할구역인 북촌 지역에 살았던 신자들은 총 61명이며 순교하신 분은 18위이고 이 중 124위 순교복자에 시복되신 분은 15위이다. 거기에 첫미사와 관련하여 순교하신 복자 주문모 야고보와 복자 윤유일 마티아, 복자 지황 사바 3위를 포함하면 가회동성당과 관련된 순교복자는 총 18위이다.

또한  19세기 중·후반의 박해로 시성되신 103위 성인 중 북촌에 거주하신 것으로 알려진 성인 3위가 있다. 


첫미사 관련 복자 3위

주문모  야고보 (1752~1801)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지황  사바 (1767~1795)


가회동 관할지에 거주한 복자 15위

강경복 수산나 (1762~1801)

강완숙 골룸바 (1761~1801)

김연이 율리아나 (?~1801)

문영인 비비안나 (1776~1801)

손경윤 제르바시오 (1760~1802)

윤운혜 루치아 (?~1801)

윤점혜 아가타 (?~1801)

이현 안토니오 (?~1801)

정광수 바르나바 (?~1801)

정순매 바르바라 (1777~1801)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최인철 이냐시오 (?~1801)

홍익만 안토니오 (?~1801)

홍필주 필립보 (1774~1801)


가회동 관할지에 거주한 성인 3위

 정하상 바오로 (1795-1839)

 정정혜 엘리사벳 (1797~1839)

 현석문 가롤로 (1797-1846)




의친왕 부부 세례


1955년 8월 9일,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가회동성당의 박병윤 보좌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선종하기 일주일 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천주교 신부를 청해 세례받기를 원했다. 자신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어했다. 그가 죽기 하루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성당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석정보름우물


20세기 초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 우물은 주된 음수(飮水), 생활용수 공급원이었으며 이곳 석정보름우물도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다.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물 맛이 좋기로 소문났었으며,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인근 궁궐 궁녀들도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북촌심처 최인길(마티아)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기간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