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설립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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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마리아 노후의 모습>

<전 마리아 노후의 모습>




1945년 8월 감격스런 조국 광복의 흥분된 열기 속에서 명동 본당의 구역 회장단 13명은 명동 성당 회의실에 모였다. 당시 서울에는 명동(종현), 중림동(약현), 혜화동(백동) 세 본당만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12사도를 본받아, 각자의 담당 구역에 본당을 세워 복음 전파에 헌신하자고 다짐하였다. 지금의 가회동 본당 구역(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으로 종로3가, 권농동을 돌아 북으로 삼청동에 걸치는 북촌 19동)은 임병팔(林秉八) 회장 관할이었다.


임 회장은 현 본당 터에 거주하던 전길헌 마리아 집을 방문하여, 매주 한 번씩 방 하나를 세전(貰錢)없이 제공 받기로 승낙을 받았다. 동지를 얻은 기쁨에 이 소식을 명동성당 이 토마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이 신부는 격려와 함께 배 수산나를 소개하여 함께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신심과 사명감이 투철한 배 수산나는 전 마리아의 수양딸로서 전 마리아에게 살고 있는 집을 팔도록 권하였다. 전 마리아는 집을 증여하면서, "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께서 주신 것이고, 이 집 역시 천주님의 것인데, 당신께서 당신의 것을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릴 뿐이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회동 본당 설립의 꿈은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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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가회동 본당의 첫 미사

1949년 4월 현재의 번지에 위치한 가옥의 방 두 개와 그 사이에 놓여있던 마루를 트고 방 아랫목에 제대를 꾸몄다. 그리고 1949년 6월 명동 본당 주임 장금구 신부를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가회동 본당 설립 인가를 받았다. 당시의 본당 교세는 전 가족이 신자인 가정은 5세대 정도, 외짝교우를 합쳐 30세대 정도였고 총신자수는 약 40명 정도였다. 그 중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수는 25명 정도, 평일 미사 참례자는 4-5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당시 성당으로 구입한 토지와 건물은 가회동 30-3번지의 대지 209.3평과 목조와즙 및 양철집 58.50평 그리고 목조초가 23.25평이었다. 매입 금액은 전체 400만환이었으며 그 조달은 전 마리아의 미사예물 100만환, 익명의 찬조금 70만환, 교우들의 성금 230만환이었다. 초기 가회동 본당 설립기금에 기여한 분으로는 전 마리아, 배 수산나, 이 요안나, 이 우술라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9년 9월 가회동성당 초대 주임으로 발령받은 윤형중 마태오 신부는 2년간 명동에서 통근을 하며 미사 집전하고 본당을 운영하였다. 뒤이어 복자수도회 방 레오 신부가 주임신부를 겸임하던 중 한 달 만에 6.25사변이 발발하였다. 본당은 인민일보의 신문사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렸다. 


<방 아랫목의 제대 모습>

<방 아랫목의 제대 모습>

_성당 신축

<백민관 신부 보좌 시절>

<백민관 신부 보좌 시절>

1952년 9월 3대 주임으로 발령받은 박우철 바오로 신부님은 1953년 임 회장과 이 아오스딩 교수로 하여금 현 헌법재판소에 주둔하고 있던 미8군 담당관을 찾아가서 본당 실정을 설명하고 미8군의 주선으로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에서 원조로 물자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연로한 박 신부를 대신하여 백민관 테오도로 보좌신부가 AFAK를 수없이 왕래하며 수고하였고 임 회장과 실무진들은 노임과 시설비 염출에 노력하여 결국 성당 신축허가 절차를 마쳤다. 


백신부가 신학교로 전임하고, 후임 보좌로 박병윤 토마 신부가 부임하였다. 건축물자를 들여올 자금 조달이 안 되어 착공을 못하던 것을 1954년 6월 6일 헌집부터 헐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자금도 없이 큰 공사를 시작하는 것은 무모하다'하여 교우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전이니 반드시 이루어 놓아야 된다는 박 토마 신부의 사명감에 감동한 이 마리아(배 수산나의 모친)가 부자유한 몸을 이끌고 본당에 찾아와 금가락지를 빼어 희사하였고, 이어 이 수산나가 돌제대를, 배 수산나와 최 말따가 전기 시설비를 희사하였다. 이러한 일이 신축공사 착공 추진의 자극제가 되어, 서 수산나, 이 막달레나 ,박 리도비나, 이 요안나, 박 마리아, 이 베로니카, 이 우술라, 이 엘리사벳 등 부인회에서 당시 총회장을 맡게 된 이 아오스딩을 도와 본당 관내 신자들의 가가호호를 방문하고, 본당구역 밖의 본당까지도 순회 방문하여 성금을 모으는 한편, 따로 100만환의 계를 모아 헌금하여 착공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구역 외의 본당들에서도 본당 모금액과 맞먹을 정도의 성금을 모금해 왔다. 교우들 중, 이 아오스딩과 서정식은 사재를 담보로 하여 120만환을 대부받아 공사비로 융통해 주기도 했다.


_성당 준공 봉헌

1954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축일에 성당 신축의기쁨과 감격 속에 성직자와 교우들은 자재원조를 해준 AFAK 미군장교들과 구역 외에서 찬조해 준 은인들을 내빈으로 모신가운데 노기남 대주교님의 집전으로 축성미사를 봉헌하였다. 준공된 건물은 벽돌집 함석지붕으로 연건평 134.85평인데 1층81.77평, 2층14.77평, 3층(종탑) 2.77평 4층(종탑) 2.77 지하실 32.77평이었고, 공사비는 550만환으로교우 성금 및 잔여 자재 운용 300만환, 계모금 100만환, 은행대출 120만환, 익명 찬조금 30만환이었다.

<노기남 대주교와 전 마리아(우측 안경 쓴 이)>

<노기남 대주교와 전 마리아(우측 안경 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