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 없이 사제, 수도자를 포함한 선교사 없이 자생한 유일한 교회이다.
쇄국정책을 하고 있었던 1700년대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스스로 천주교서적을 구입해 연구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순번을 정해서 미사와 성사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를 가성직제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자들이 교리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가성직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는 북경교구가 설립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북경교구청에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아무도 신앙을 전해주지 않았고 선교사를 보낸 적도 없었는데 스스로 연구하여 신앙을 받아들인 사실에 북경교구청의 주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북경교구는 교황청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고 전 세계의 지역교회에서도 이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성사는 성직자에 의해 거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북경교구청에서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쇄국정책 때문에 서양인사제를 보내지 못하고 한국 사람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은 1794년 12월 압록강이 얼 때를 기다려 주문모 신부를 밀입국 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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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는 북촌심처라고 불리던 가회동본당 지역에 와서 많은 신자들에게 우선 세례를 베풀고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마티아)집에서 드디어 조선의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 장소는 북촌심처라고 칭했던 지금의 북촌한옥마을 언저리였다. 지금은 그 당시와 지도가 너무나 많이 바뀌어 어느 지점이었다고 특정할 수는 없으나 북촌한옥마을의 한 복판에 자리 잡은 가회동 본당 근처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첫 미사가 드려진 이후에 불행하게도 밀고자가 나오면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이 사건을 북산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역관(지금의 통역관을 칭함)이었던 최인길은 주문모신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주문모 신부라고 자칭하면서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가 아무리 중국말을 잘 했어도 조선인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이 나면서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다. 결국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을 도왔다가 체포된 윤유일, 지황과 함께 지금의 단성사 자리에 있었던 좌포도청에서 장하치명(매 맞아 죽음으로 순교함)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첫 천주교 박해인 을묘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수배 중이었던 주문모 신부는 초대 여성총회장이었던 강완숙(골롬바)의 집(가회동본당 관할지역)에서 피신을 하게 되었다. 당시 혼자 사는 여인의 집에 외간남자가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당시 독신이었던 강완숙의 집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안전했다. 주문모 신부를 아직 잡지 못했던 조정에서는 박해를 더욱 심하게 했기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희생되면서 주문모 신부는 본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국경을 넘기전에 “목자가 어찌 양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크게 자각하고 자수하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발걸음을 한양으로 돌려서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두 번째 박해인 신유박해(1801)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양 귀에 화살을 뚫고 목을 친 다음에 그 목을 긴 창에 꽂아 높게 들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처형)를 당한다. 이어 같은 해에 강완숙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어서 기해박해(1839)에는 앵베르주교(아베마리아의 작곡가 구노의 절친한 친구였고 구노는 이를 슬퍼하며 성가 284장 “무궁무진세에”를 작곡하여 봉헌하였다.),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다. 병오박해(1846)에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였고, 병인박해(1866) 때에는 베르뇌주교, 다블뤼 주교가 순교하였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박해인 기묘박해(1879)까지 100여 년에 걸친 모진 박해는 황실에서 주도했다.


103위 순교성인들을 비롯해서 아직 성인품에 모르지 못해 성인 청원을 올린 하느님의 종과 그 외의 무수한 순교자들은 모두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목 잘려 죽고, 마치 인생을 실패하고 불운하게 죽어간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박해를 주도했던 황실은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힘과 권력으로 천주교신자들을 박해하고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사교)로 여기고 씨를 말리기 위해서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래서 황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였을 지 모르나, 마지막 황실에서 모두 천주교를 받아들이므로 해서 마침내 신앙이 승리하였슴을 입증하게 된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왕비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가회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순교자들이 믿었던 신앙의 진리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가회동본당에 보관되어있는 옛 세례 문서를 가회동본당 사무장(김상규)이 찾아내었는데 의친왕의 이름이 ‘이 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왕조가 끝났음으로 ‘왕’이라는 호칭 대신에‘公’을 사용했다. 그리고 의친왕이 선종할 때 당시의 신문기사에서 의친왕이 세례 받은 동기를 알 수 있다.


고종황제 둘째 아드님인 李堈이강 義親王의친왕은 8월 16일 안국동 175번지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치었다. 풍문여고 校舍교사 뒷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古風고풍스러운 別宮별궁에서 파란 많은 이른 아홉 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남아 있는 李 王家이 왕가로서는 오직 한 분인 義親王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할 弔客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亡者망자를 위한 鍊禱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靈前영전 앞에 모신 사진을 확대 복사하는 데도 당황해야 하는 家運가운이기도 했다.섬돌 밑이 도는 낡은 마루 위에 가마니가 깔려있고 그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屍布시포 앞에 조그마한 床상이 마련되어 있고 상위에는 가톨릭 식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8인의천주교 신자들이 “主주는 蕩子탕자 비오를 긍휼히 여기소서.”하면서 기도를 할 뿐 12시까지 별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 중략 )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歸依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領洗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入敎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先祖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最近史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贖罪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繁盛번성해가는 것은 ‘眞理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 妃비 金淑김숙(77세) 여사도 시내 嘉會洞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領名영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 미사는 20일 오전 10시 明洞명동 천주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京鄕新聞> 1955년 8월 18일


을묘박해(1795)로 시작하여 기묘박해(1879)까지 모두 황실에서 주도하였다. 황실에서는 옥쇄로 도장을 찍은 척사윤음을 전국에 배포하고 천주교를 씨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뿌리째 뽑으려고 했던 그 천주교가 오히려 확산되고 신자들을 죽일수록 신자들은 살아나니 천주교가 바로 진리라는 것을 마지막 황실에서 시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황실에서 세례 받았다는 것은 순교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이 최종의 승리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지막에 승리할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천주교의 신앙인들이 어리석어보이고 패배자같이 보여도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가회동성당관할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