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주교에 파견된 첫 사제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는 “북촌 심처(北村 深處)”라고 불리던 가회동 본당 지역의 최인길(마티아)의 집에서 지내며 언어를 배우면서 많은 신자들에게 우선 세례를 베풀고, 1795년 4월 5일 예수부활대축일에 조선의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첫 미사가 드려진 이후에 불행하게도 밀고자가 나오면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이 사건을 북산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역관이었던 최인길(마티아)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주문모 신부라고 자칭하면서 자수하였으나 발각되고,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을 도왔던 윤유일, 지황과 함께 단성사 자리에 있었던 좌포도청에서 장하치명을 하게 되었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초대 여성총회장이었던 강완숙(골롬바)의 집(북촌 가회동본당 관할구역)으로 피신을 하였고, 이후 1801년 순교할 때까지 주로 그곳에 기거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조선 황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었던 의친왕 ‘이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왕비 ‘김숙’은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1955년 가회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신앙의 진리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경향신문 1955년 8월 18일 기사 내용

고종 황제 둘째 아드님인 이강 의친왕은 8월 16일 안국동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치었다. 풍문여고 교사 뒷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별궁에서 파란 많은 이른 아홉 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 남아 있는 이 왕가로서는 오직 한 분인 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 할 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망자를 위한 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영전 앞에 모신 사진을 확대 복사하는 데도 당황해야 하는 가운이기도 했다. 섬돌 밑이 도는 낡은 마루 위에 가마니가 깔려 있고 그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포 앞에 조그마한 상이 마련되어있고 상 위에는 가톨릭 식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8인의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할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이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시내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영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미사는 20일 오전 10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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