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땅 위에서 봉헌한 처음 미사

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1775~1801)이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국내 사정을 알리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기입한 밀서. 그 속에는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한 증언도 담겨 있었다. 원본은 의금부에서 압수하였는데 1894년 이후 우연히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입수해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교황에게 전달했다.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전시된 사본은 원본을 1:1 복사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 성해
김대건 신부 성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2~1846) 안드레아 신부는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교구 설정 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유학길에 올라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했다. 1844년 부제품을 받고, 1845년 페레올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아 신부가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영세를 주고 외국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그의 나이 25세 때 새남터에 피를 뿌려 순교하였다. 본 십자가 중앙에는 김대건 신부의 성해가 모셔져 있다.

프랑스 잡지
프랑스 잡지

1925년 프랑스에서 발행한 , 이 잡지에는 1839년 9월 21일 서울 근교에서 일어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앵베르주교의 순교 장면을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다. 참수형으로 잘린 목을 긴 창에 꽂아 만방에 알리는 군문효수의 처참했던 장면을 표현했다. 첫 미사를 집전했던 주문모 신부와 김대건 신부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순교했다.

천주실의
천주실의

천주실의는 예수회 중국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한역서학서로 동양 여러 국가에서 서양에 관한 학문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 후기 중국을 방문했던 직식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젊은 지식인들에 의한 서학 수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으니 천주실의는 한국 교회사에서 대단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래 없는 자생교회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안전해 준 가톨릭신앙은 “천주실의” 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본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원본은 1800년대 박해당시에 읽혔을 책이다.

주교요지
주교요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자 정약종(1760~1801)이 지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리서이다. <천주실의>의 내용을 기반으로 서술한 본 교리서는 당시 소외받던 부녀자와 서민층을 위해 순 한글로 쓰였으며 박해시기에 교회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언문이라 하여 천시하던 한글을 널리 보급하고 상용화하여 오늘날 표준어로 정착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척사윤음
척사윤음

'척사'는 사악한 종교를 배척하라는 뜻이고, ‘윤음’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문서를 말한다. 즉 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하라는 왕의 명령이 담긴 책이다.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정하상 등 70여 명을 처형하고 난 뒤 1839년에 헌종이 내린 어명으로 옥쇄가 찍혀있다. 앞에는 한문, 뒤에는 한글 번역이 붙어 전 백성 모두에게 고루 읽히도록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한글의 활자체가 돋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했다.

기해일기
기해일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당시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총회장이었던 현석문(가롤로)에게 의뢰해 만들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초로 했으며 한글로 쓰였다. 3년의 탈고 끝에 교우들에게 배포했으나 고종 때 소실되었고 이후 교구장 뮈텔 주교가 어느 신자의 집에서 발견해 개정판을 냈다. 한문이 상용어였던 당시에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문헌들은 대부분 한글로 되어있어서 한글 보급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제일 먼저 최인길이 매 맞아 죽으면서 가회동 지역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박해를 기록해놓은 책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기해일기이다. 기해일기는 기해박해 때 순교자들의 얘기를 한글로 기록했다. 그때 당시만하더라도 한글은 언문이라고 천시하면서 글로서 취급도 안 했다. 황사영백서도 한문으로 되어있다. 이 백서는 로마에 소장되어있는 원본을 1:1 복사 한 것이다. 비단에 세필로 쓴 문체가 아름답다. 이렇게 모두 한문을 사용하던 시기에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자신이 받아들인 신앙과 박해사실을 양반들 뿐 아니라 부녀자들이나 못 배운 사람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여 한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