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소박한 땅 위에서 봉헌한 처음 미사, 하늘의 말씀을 전하다


"조선 사회는  양반, 상민,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차별을 강요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신분 제도가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아무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


조선의 지식인들은 나라의 앞날을 위해 변화를 염원했다. 세상을 바꿀 진리를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천주학을 접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성직자 없이 하나 둘 모여든 평신도들에 의해 성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알게된 북경교구청에서는 전 세계에 유례 없이 자생한 한국 교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성사는 사제에 의해 이뤄져야 하므로 중국인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외국 선교사제로는 처음으로 국내에 밀입국한 그는 북촌심처(北村深處)에 위치한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무르며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었다. 그 자리에는 <주교요지>를 저술한 정약종(아우구스투스),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 최창현(요한), 윤유일(바오로), 김종교(프란치스코), 지황(사바) 등 천주교 정착을 위해 애쓴 복된 이름들이 함께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문모 신부와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 땅의 첫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때가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이었다. 이후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강완숙(골룸바)의 집에 숨어서 성사를 거행해야 했지만 그럴수록 신앙인들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 진리를 증거하며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밀고자가 생겨 밀입국한 중국의 신부가 가회동 일대에서 미사를 드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곧 수배령이 내렸다. 최인길은 중국말에 능통한 역관이었는데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그 사제라고 속이고 자수하였으나 발각되어 곤장을 맞아 순교했다. 이후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박해받는 신앙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목자가 양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옳지 않은 결정임을 깨닫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자수했고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강완숙도 비슷한 시기에 순교의 길을 걸었다. 안타까운 희생이 이어지자 이를 알리고자 한 황사영이 흰 명주천에 122행, 1만 3384자에 달하는 긴 편지를 쓴다. 이것이 바로 명주에 담은 신앙 백서 帛書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중략)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아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 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 황사영


이토록 모진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로마교황청에서는 독자적인 발전을 일구는 조선 교구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한국인 최초로 사제 수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들과 전교에 힘쓰다가 순교하기도 했다.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신념은 근대화 운동과 국민 계몽과 그 궤를 함께 했으며, 신앙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가회동 일대는 본당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_믿음의 무게만큼, 사랑의 깊이만큼 정성껏 쌓아 올린 성전


우리 역사 속의 천주교는 단지 서구의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정신이었다. 종교적 복음인 동시에 사회적 복음으로 사랑과 헌신, 평등한 사회를 실현케 했고, 신분제도와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웠다. 쇄국정책과 일제 치하를 거치면서 한국 천주교 역사의 중심에 가회동성당이 세워졌다.


"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께서 주신 것이고, 이 집 역시 천주님의 것인데, 당신께서 당신의 것을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릴 뿐이다."

– 전 마리아


1945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조국은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4년 후 명동 본당 주임 장금구 신부를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한 후, 명동본당의 공소에서 가회동 본당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신자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당시 본당 신자였던 전 마리아는 임병팔 미카엘 구역회장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모임을 갖다가 부지 확보에 나섰다. 이웃의 한옥을 매입하고 자신이 살던 한옥을 가회동성전 부지로 기증한 것이다. 이후 백민관 신부가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면서 모두가 염원하던 성전 건축의 꿈이 실현되었다. 백민관 신부는 무작정 미군을 찾아가 성전을 지어줄 것을 호소하였고 미군은 그의 진심에 미국의 가톨릭 구호 단체의 지원이 가능하도록 연결해주었다. 이렇게 모은 기금의 기초 위에 교우들의 소망으로 지은 성전은 남부유럽식과 고딕 양식이 조화로운 모습과 아름다운 종소리로 더욱 유명해졌다.


_참된 신앙의 승리, 거룩한 역사의 증거가 되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요한 8, 12)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준주성범>


195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지 10년째 되는 날에도 가회동성당의 영광은 계속되었다. 오랜 시간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발걸음이 결국 본당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운현궁 별궁에서 79세 일기로 승하한 의친왕이 임종 전 가회동성당 박우철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진리가 박해를 이겼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의친왕 이강은 외롭게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왕손이다. 그는 조부인 흥선대원군이 수많은 천주교 신앙인들을 무참히 사형시킨 것에 대한 참회의 표시이자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때 도움을 준 수녀들에 대한 보답으로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했다. 그 증거로 왕실의 물건을 수녀들에게 건네주었는데 현재 순교복자수녀원은 그때의 유품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의친왕은 임종 전에 딸 해경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수녀원에 다 있으니 수녀원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의친왕의 정비 김숙(마리아) 역시 늘 묵주를 손에 들고 <준주성범>을 즐겨 읽었다. 노후에 눈이 어두워지자 주변 지인들에게 읽어달라고 할 정도로 이 책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_복음에 화답하는 목소리, 모두 하나된 미사 전례


한국 교회가 그 뿌리를 굳건히 하고 자리잡을 즈음, 세계 가톨릭 역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요한 23세가 교황 자리에 오르면서 1962년부터 3년에 걸친 ‘제2차 바티칸공의회 Concilium Vaticanum Secundum’가 열린 것이다. 본래 공의회는 교회의 지난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교황을 비롯한 전 세계 추기경과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믿음과 미래에 대한 다양한 안건을 나누는 장이다. 요한 23세가 선포한 제2회 바티칸공의회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교회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기회였다. 거대한 규모로 진행된 것은 물론 가톨릭계 성직자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평신도들도 회의에 참가할 만큼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모습이었다. 공의회를 통해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미사 전례였다.


“거룩한 본문들과 예식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들을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잘 묘사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가능한 한 그것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그것들에 충만히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가르침


미사는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전례이므로 그에 필요한 모든 장소, 시간, 미사도구 등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의 미사와 성사 집전은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성경과 성가 역시 라틴어로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정확한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고 따라 읽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각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복음을 선포하고 계시며, 백성은 하느님께 때로는 기도로 응답한다."고 <전례헌장>에서 말하듯이 미사는 하느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미사 전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도미누스 보비스꿈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엣꿈 스삐리 뚜 뚜오    "또한 사제와 함께"